Vaxxers / 세라 길버트·캐서린 그린
[사진 제공 =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찾은 게 아니다. 설계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Vaccines are not found. Vaccines are first designed, then they are made)."한국에서 접종된 첫 코로나19 백신이자 가장 많은 사람이 맞은 백신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만들고 글로벌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가 만들어서 일명 'AZ 백신'으로도 불리는 이 백신의 탄생 비화가 책으로 나왔다. AZ 백신의 어머니라 할 만한 두 사람, 세라 길버트 옥스퍼드대 제너 연구소 백신학 교수와 캐서린 그린 옥스퍼드대 임상 바이오제조시설(CBF) 대표(박사)가 공동 집필한 책 'Vaxxers'가 요즘 백신 못지않게 인기다.
출간 전부터 예약 판매를 시작하더니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등극했고, 영화 제작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책을 집어들면 무슨 뜻인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 편의 드라마가 따로 없다.
첫 번째 주인공인 길버트 교수는 백신 설계자다. 2000년대 초반부터 말라리아, 신종 인플루엔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까지 백신을 설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백신 종주국인 영국 옥스퍼드대 제너연구소를 이끌게 됐다. 제너연구소는 1796년 천연두를 예방하는 우두 백신을 만들어 세계를 구한 에드워드 제너 박사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곳이다. 그로부터 225년 후 제너연구소장인 길버트 교수가 코로나19로부터 인류를 구할 AZ 백신을 만들어 내자 연구소 간판을 '길버트 연구소'로 바꿔 달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또 다른 주인공인 그린 박사는 임상의 대가다. 실험실에서 '설계된' 백신을 실제 물질로 만들어서 단계별 임상시험을 하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 CBF가 가장 뛰어나다. 덕분에 CBF의 실험실은 항상 풀 부킹 상태. AZ 백신을 위해 크리스마스 연휴나 일요일도 없이 연구진은 2교대로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저자들은 2020년 1월부터 백신 개발에 이르기까지 1년여 과정을 시간순으로 정리했는데, 종합해보면 백신 개발에 꼭 필요한 요소가 세 가지로 압축된다.
노력, 돈, 그리고 효율적인 대학·정부다. 첫째, 백신은 천재 과학자가 발견해 낸 게 아니다. 수많은 연구자의 땀과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길버트 교수는 말한다. 그는 "대단한 과학적 발견에는 드라마 같은 순간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외로운 천재 과학자가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거나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물이 넘치는 걸 보고 '유레카'를 외치는 순간은 없다는 것. 그린 박사는 "오늘날 최첨단 과학 영역에서 일한다는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실험실에 출근해서 성실하게 일해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라며 AZ 백신도 그 결과라고 말한다.
실제 길버트 교수는 2014년 메르스 백신 개발에 참여하면서 침팬지에서 추출한 아데노바이러스 벡터 방식의 백신 연구에 성공한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코로나19 백신 개발에도 아데노바이러스 벡터를 사용해 백신을 디자인한다. 덕분에 백신 개발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AZ 백신의 첫 임상 결과가 나온 2020년 11월 21일의 얘기는 연구자들의 고된 노력을 단면처럼 보여준다. 토요일이었는데도 길버트 교수는 연구실에서 밤새 4개 대륙에서 수집한 첫 임상 결괏값을 기다린다. 결과는 대성공. 백신의 감염 예방 효과(efficacy)가 50%만 넘어도 성공인데, 70%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일요일 밤 11시까지 연구 결과를 언론·규제당국 등에 알릴 원고를 쓰다가 퇴근했고, 월요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보도자료 문구를 최종 승인하고 다시 차를 타고 출근했다고 적어놨다. 새벽부터 몰려온 기자들이 영국 옥스퍼드대의 백신 개발자 여교수가 멋지게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진을 찍고 싶어 했지만, 겨울 새벽이라 추워서 차를 타고 갔다는 부분을 읽다가 참았던 웃음이 빵 터졌다. 길버트 교수는 그 와중에 새벽에 청소하는 연구실 청소부 두 명에게 마스크는 코까지 써야 한다고 주의도 줬다. 천재 과학자의 낭만적인 캠퍼스 사진은커녕 연구실이 인생 전부인 생활형 과학자들의 일상이다.
둘째, 백신 개발에서 꼭 필요한 돈이다. 그것도 아주 충분하게. 오죽하면 4번째 챕터 제목이 '돈,돈,돈(Money, Money, Money)'이다. 초기에 임상용으로 제작된 실험실용 백신은 공장에서 배양기로 양산된 게 아니라 하나씩 수작업으로 만든 것이다. 그린 박사는 지난해 3월 옥스퍼드대 CBF에서 몇 번의 실패 끝에 만들어 낸 극소량의 백신을 이탈리아 제약사 공장으로 옮긴다. 이탈리아에서 임상용으로 500바이알(병)을 겨우 만들었는데, 당시 이탈리아와 영국 간 항공편이 모두 끊겨서 백신을 싣고 올 방법이 없었다.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결국 2만파운드(약 3150만원)를 주고 소형 전세기를 띄워 아이스박스에 백신을 실어 날랐다. 그렇게 해서 영국인들에게 처음 맞힌 백신이 첫 임상시험 분량이 되고 그 후 아스트라제네카가 양산한 백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학자들의 뛰어난 역량만으로 백신이 양산되는 게 아니다. 효율적인 대학과 정부의 뒷받침은 필수적이다. 길버트 교수팀이 초기에 이탈리아 임상회사와 계약을 맺으려 했는데 실패 가능성 높은 이 연구에 흔쾌히 자금을 지원한 것은 기업도, 자선단체도 아니라 바로 옥스퍼드대였다. 길버트 교수는 연구 과정에서 정부 관계자들에게 불려 갔다. 브리핑은 물론이고 정부 자금 지원 요청 서류 작성 등 하나하나가 귀찮은 일인데, 당시 영국도 총리가 코로나19에 걸리고 내각이 격리에 들어간 상황이라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하지만 3월 중순 길버트 박사의 브리핑을 들은 영국 정부는 바로 백신 개발의 급박함을 인식한다. 통상 수년이 걸리는 임상시험 허가를 한 달 만에 내주고,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정부 지원금 2000만파운드(약 317억원)가 입금된다. 국산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정부 관계자들이 참고할 만한 부분이 이 책에 많이 담겨 있다.
[한예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