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멈춰 상처입은 서로를 바라보자

 

이젠 멈춰 상처입은 서로를 바라보자

옥중에서 편지가 왔다. 아주 두툼하다. 봉투부터 손 글씨로 쓴 주소가 컴퓨터로 쓴 듯 반듯하다. 알고 보니 감사하게도 ‘산모퉁이 돌고 나니’를 읽고 편지를 띄웠다 한다. 그는 옥에 갇혔으나 칼럼을 읽고 “널브러진 심령에 용기가” 났다는 고백이다. 편지를 열어보니 긴 사연과 성경을 몇 십 장 필사하여 동봉했다. 그 많은 양을 그토록 바르고 깨끗하게 쓰려면 얼마나 정성을 다하였을까! 사연을 읽어 보니 지난날을 돌이키고 있다. 지난날 무절제로 인한 실패, 결국 노숙 생활과 알코올중독, 그리고 불행하게도 “죄인 되어 부끄러운 생활” 중이라는 아픈 이야기가 하얀 종이에 반듯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담장 밖에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멈추어 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제 격리됨으로 멈추어 선 것이다. 그가 담장에 갇히게 될 때,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그의 표현대로 “널브러진 심령”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그 둘러친 담장으로 인하여, 그에겐 하늘의 문이 열린 것이다. 결국 그는 옛 시절의 “은혜가 회복되어” “성경 필사에까지 이르러 분수처럼 흩어지는 주님의 은혜를 회복”하고 있다고 감사하고 있다. 그의 편지엔, 흔히 뒤따르는 영치금 요청도 없었다. 나는 성경 필사를 위한 비용에라도 보태도록 영치금으로 답했다.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일생에 단 한 번도 궂은날이 없이 사는 것일까? 한 번의 실수나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일까? 천생연분으로 만난 부부이기에 곡절도 없이 죽는 날까지 해로하고, 아이들이 모두 성공해서 효도 잘하는 것일까? 사고도 없고 건강하게 살며, 원하는 것 다 갖고, 다 누리는 것일까? 민족을 구원할 영웅처럼, 의의 화신처럼 행동하면 잘 사는 것일까, 그러면 사회 정의가 실현될까? 이렇게 해서 잘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지구에서 한 해에 교통사고로 죽는 이가 135만명이나 된다. 우리나라에서만도 한 해에 4000명이 넘는다. 그리고 교통사고를 당하는 이는 30만명이 넘는다. 이는 속초시의 4배, 서귀포시의 2배, 경주시보다 몇 만 명이 많다. 한 해에 경주시보다 큰 병동(病棟)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는 인간이 부도덕하지 않더라도 겪는 일상의 고통이며 비극이다.

이뿐일까? 도덕적·사회적 실수가 없어도 찾아오는 암은 어떠한가? 현재 우리나라 암 환자는 200만명이 넘는다. 해마다 암 발병자가 20만명이 넘고 있다. 인구 25명 중 한 명이 암 환자인 셈이다.

그리고 최근 한 해 이혼한 부부가 10만쌍이 훨씬 넘는다. 그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들의 상처는 그 얼마나 크겠는가! 더구나 한 해 자살자가 1만3000명이 넘는다. 하루 평균 38명이나 된다. 코로나19 사망자 수와 비교한다면 어떠할까? 코로나19 누적 사망자는 2100여 명이다. 한 해를 기준으로 하면, 자살자 수는 코로나19로 죽는 수의 10배가 된다. 늘 그래 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코로나 유행이 우리를 크게 위협하지만, 실은 우리의 일상이 늘 위태로운 여정이었다. 이 인간사 자체를 보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나 다른 모든 성현도 말한 “깨어 눈이 있으면 보라!”는 뜻이리라. 실로 코로나 팬데믹도 팬데믹이지만 우리의 일상이 이처럼 사고와 질병과 죽음의 팬데믹 가운데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무한 경쟁에서 나만은 살아남아 행복과 성공을 얻어야 한다고 멈추어 서지를 못하고 있다. 하지만 두려워서 멈추어 세우지 못하는 자전거를 세우고,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행복과 성공은 너를 이기거나 정죄함으로 찾아들지 않는다. 너를 바라보고 우리의 그 상처와 아픔, 시행착오와 실수, 심지어 허물과 죄를 서로 이해하고 씻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또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한국의 GDP는 93달러(1961년)에서 오늘날 이미 3만달러를 넘어섰고, 세계 10위에 이르러 이탈리아를 앞질렀다. GDP가 무려 320배가 넘은 성장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감이나 국민의 자부심은 어떠한가? 인간사 일상의 팬데믹을 외면한 채, 정치와 이념 투쟁을 멈추어 세우지 않으면 어찌 될까? 서로 상처는 깊어지고, 인간사 이 고(苦)와 죄(罪)는 무저갱의 문을 열지 않을까?

찾아드는 가을엔, 옥중에 있지 않아도, 우리의 삶과 역사가 이미 죄의 팬데믹 벽에 갇힌 줄 깨닫자. 삶과 역사를 멈추어 세우라. 그리고 상처 입고 죽어가는 나와 우리를 바라보자. 그리고 너를 너로서 바라본다면, 가을보다 푸른 새 하늘이 열리지 않을까! 이 광복절을 맞는 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