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 왁싱, 족집게, 레이저 제모…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난 왜 면도를 하지? 누구를 위해 하지? 사회? 나 자신? 남자들?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여서?
자, 이 얘기를 꺼낼 때가 됐다. 음모. 소중이 털. 비키니 존. 아래 거기. 고상하게 표현하거나 수위를 낮춰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난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다. ‘음모’라는 의학 용어를 사용해서. 단순히 얘기만 하자는 게 아니다. 이 단어를 금기시하는 사회적 통념을 깨고 이런 대화를 좀 더 편하게 나눠보는 건 어떨까? 결국 누구에게나 털이 있지 않나. 이걸 어떻게 할지 정하는 것도 개인이 선택할 문제다.
몸에서 털이 자라기 시작할 때부터 난 내 체모에 꽤 특별한 애정을 가져왔다. 내 음모를 처음 본 순간이란! 처음 마주한 겨드랑이 털, 점점 두꺼워지던 다리털 전부 기억난다. 다리털은 고등학생 때부터 면도했다. 다들 했으니까. 광고에서도, 심지어 영화에서도 사람들은 면도하고 있었다. 언니가 체모를 뽑는 모습을 보며 나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날도 있었다. 첫 왁싱 때 느낀 고통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아픈 걸 한다고? 과연 할 가치가 있는 건가, 충격에 빠진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인그로운 헤어가 났을 때, 처음으로 면도하다 베었을 때, 처음으로 면도 후 발진이 생겼을 때도 기억난다. 부드럽고 빛나는 복숭아 같은 ‘소중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현실은 그저 울긋불긋한 발진과 인그로운 헤어, 미처 제거하지 못한 털이 드문드문 보이는 음부였으니까. 모델 세계에서는 음모가 없는 듯 보여야 한다. 아니, 머리털과 눈썹 말곤 내 몸에 털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눈썹 잔털도 남김없이 정리해야 한다. 다리털은 말할 것도 없고 수영복이나 속옷 화보를 찍을 땐 음모가 한 올도 보여선 안 된다. 지금까지 일하면서도 종종 일회용 면도기가 손에 들린 채 화장실로 보내지곤 했다. 그러면 세면대에 다리를 한쪽씩 올린 채 면도해야 했다. 도대체 여성을 털이 없는 생명체처럼 만들길 원하는 사회는 어떤 곳이며, 여성은 왜 체모 때문에 수치를 느껴야 한단 말인가?
질레트 비너스(Gillette Venus)에서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여성 응답자 중 82%가 음부라는 의학 용어 대신 그곳을 칭하는 은어를 사용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결과였다. 그래서 내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대상으로 자체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표본이 공정하게 선정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주길. 응답자 대부분이 미국에 거주하는 25~34세의 여성이다). 설문에 응한 1,433명의 여성 중 약 50%가 ‘비키니 존’, ‘아래 거기’ 식의 은어를 사용한다고 답했다. 51%는 본인의 음모에 민망함을 느끼거나 음부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 자체가 당혹스럽다고도 답했다(남성 응답자의 경우 21% 정도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번 설문으로 음순, 음문, 음부 모두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단어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성 응답자 중 88%는 음모가 보일 수 있는 상태로 해변에 가는 것이 창피하다고 답했다. 91%는 면도, 왁싱, 족집게, 레이저 제모 등의 방식으로 음모를 제거한다고 답했으며, 이 중 31%는 누가 자신의 음부를 볼 일이 없다면 더 이상 그런 수고를 하지 않을 거라 답했다.
이로써 우리 여성이 자신의 몸과의 관계를 되찾는 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수많은 여성이 가부장적 사회가 강요하는 미의 기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며 살고 있다. 기업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느끼게 하고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바람직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제품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게 정상일까? 뷰티, 패션 트렌드가 계속 바뀌듯 털에 대한 트렌드도 계속 바뀐다. 1970년대엔 음모를 그대로 두는 게 유행이었지만 지금은 음부가 바비 인형같이 매끈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는 이미지가 넘쳐난다. 이해가 안 된다. 음모나 음순이나 인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들인데 왜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질레트 비너스에서는 ‘당신의 음순을 위한 빅뉴스(Major News for Your Labia Majora)’라는 슬로건과 함께 ‘질레트 비너스 포 퓨빅 헤어 앤 스킨(Gillette Venus for Pubic Hair & Skin)’이란 제품 라인을 선보였다. 신체 부위에 성별을 구분하거나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 음모나 음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듯하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건 굉장히 고무적이다. 언급 자체를 금기시하는 사회적 통념이나 이로 인해 느끼는 수치심을 근본적으로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금기를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도 미디어나 광고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바꾸는 거니까. 내 반응은 어땠냐고? 안도 그 자체였다. 드디어 누군가 말했어! 음부라고 말했다고!
이 단어를 직접적으로 제품명에 사용한 면도기나 제모용품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대부분 핑크색이나 꽃무늬로 여성 전용 제품임을 강조해 별개의 제품처럼 보이게 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하지만 이렇게 특정 단어를 정확하게 단도직입적으로 사용하면 지칭하는 대상이 더 객관적으로 보인다. 물론 어떤 단어를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도, 스스로를 가장 잘 나타낼 단어를 고르는 것도 개인의 선택인 건 맞다. 중요한 얘기다. 하지만 적어도 주류 미디어와 광고에서는 가장 객관적이고 수치심을 적게 느끼게 하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음모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더라면 내 설문 조사에 참여한 여성 응답자 절반은 자신의 음모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다음 질문은 이거다. 한국에서도 이런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지 않을까? 눈에 보이면 그만큼 이 같은 주제에 대한 표현이나 대화 방식이 바뀌고 음모에 대한 여성의 태도도 바뀌지 않을까?
‘사회에 굴하지 않고 음모를 길러주겠어’라며 가부장적 사회가 세운 기준에 반기를 드는 것도, 여성은 털이 많아선 안 된다고 배워온 기존의 성 규범을 깨뜨리는 것도 페미니즘의 일환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사회가 정한 규범에 따를 필요도 없고 내 몸을 어떻게 할지 선택할 권리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걸 깨닫는 쪽에 좀 더 가깝다. 오로지 나를 위해 내 몸을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음모를 한 가지 방법으로만 대했다면 과연 내가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을까? 평생 여성이라면 응당 음모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제모를 해왔다고 해보자. 제모를 하는 게 진정 날 위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 역으로 음모 제모를 수치스러운 일이라 여기는 사회에서 살았다고 해보자. 정말로 제모를 하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인지, 내가 음모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을까?
언젠가 우리의 몸을 부끄러워할 일이 없는 사회에서 살 수 있길 바란다. 내 설문 조사에 응한 여성 중 87%는 음모나 음부가 주류 미디어나 광고에서 더 현실적으로 다뤄졌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모두에게 음모가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음모를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모두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알고 있다. 그 마음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내 음모를 어떻게 할지는 내가 정할 일이란 것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사회가 강요하는 미의 기준을 깨고 사회가 우리 신체 부위에 붙인 오명과 이로 인해 느끼는 수치심을 없애려면 우선 우리가 수적으로 우세해야 한다.
스스로 질문해보자. 난 왜 면도를 하지? 누구를 위해 하지? 사회? 나 자신? 남자들?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여서? 체모가 그렇게 불쾌한 존재인가?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지금까지 내리던 결정이 진정 나를 위한 일이었는지 다시 고찰해보는 시간을 즐기길 바란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