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젖은 단풍나무
아주 오래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젖은 숲에서 타는 혀를 온몸에 매단 그 단풍나무,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물먹은 포풀린 쫘악 찢는 외마디 새 울음, 젖은 숲 젖은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살면서 문득 그 단풍나무를 떠올린다 저 혼자 붉은 단풍나무처럼 누구라도 마지막엔 외롭게 견뎌내야 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라 생각했다 그대 바로 지금, 느닷없이 고통의 전면에 나서고 이윽고 여울 빠른 물살에 실린 붉은 잎사귀,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초록 숲이지만 그 속엔 단풍나무가 있고 때론 비 젖은 잎, 여윈 손처럼 내밀었다 아주 오래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말없음표 같은 빗방울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내미는 낯선 손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아직 몰랐다 다만 여름 숲은 초록빛이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그 젖은 단풍나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고통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
이렇게 살다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자신의 세운 두 무릎 사이에 피곤한 이마를 묻을 때 감은 눈 속 따스히 밝히는 한 그루 젖은 단풍나무를 보리라.
지금이 꼭 가을이 아니라도.
* 이면우 : 1951년 대전 출생. 중학교 졸업 후 보일러공으로 일하다가 마흔 살 넘어 시 쓰기 시작. 시집 『저 석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십일월을 만지다』 등 출간. 노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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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시인이 된 과정부터 특이합니다. 남들처럼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통하지 않고 40세에 시집을 출간하는 방법으로 문단에 나왔죠. 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뒤 공사판을 떠돌다가 어느 날 문득 시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그렇게 쓴 시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등단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딱히 시인이 되는 길을 알지 못했지요. 급기야 주변 사람들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그 덕분에 1991년 첫 시집 『저 석양』을 냈는데, 시인의 약력에는 ‘학력 별무, 건축배관공’이라고 썼지요. 그때 시집에 붙인 ‘시인의 말’이 뭉클합니다.
‘나는 이 속의 어떤 시편을 줄줄 울면서 썼다. 천 권의 책 읽기를 끝낸 네 해 전 나는 생물도감, 느타리버섯 기르기, 원예사전 각 한 권씩을 이삿짐에 꾸려 넣고 여편네를 앞세워 마침 진눈깨비 내리던 이 호숫가 오두막으로 왔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보다 원초적이다. 사람의 사는 일이 이리도 풍성한 은총 속에 있음을 내 이곳에서 체득하였다.’
이처럼 그의 시에는 ‘줄줄 울면서’ 쓴 슬픔과 먹고살기 위해 준비한 생물도감과 버섯 기르는 방법과 호숫가 오두막에서 체득한 사람 사는 일의 풍성한 은총이 동시에 배어 있습니다. 오래전 ‘젖은 숲에서 타는 혀를 온몸에 매단 그 단풍나무’를 만난 이후로 그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의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 단풍이 천지를 물들이고 있습니다. 단풍 물이 든 가을 숲에서는 마음이 순해집니다. 바알간 잎을 만져 보면 금세 손바닥에 단물이 묻어날 것 같지요. 요즘 산과 들은 어딜 가든 아름답습니다. 형형색색의 물감을 뿌린 만산홍엽의 계절이니까요.
당단풍 나무가 많은 설악산의 대청봉을 빨갛게 적신 물감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동안 산에 든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붉어집니다. 활엽수종에 뒤덮인 오대산은 오렌지색과 노란색으로 빛나고, 내장산에서 만나는 갓난아이 손 같은 ‘애기단풍’도 더없이 이쁩니다.
지리산 피아골의 연주담~통일소~삼홍소 구간 또한 가을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곳의 삼홍(三紅)은 온 산이 붉게 타서 산홍,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쳐서 수홍, 그 품에 안긴 사람이 붉어서 인홍이라고 하더군요. 경북 청송 주왕산과 전남 해남 두륜산, 경기 포천 국립수목원, 가평 아침고요수목원, 강원 홍천 은행나무숲도 단풍 명소이지요.
단풍은 하루 20~25㎞ 속도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달립니다. 올가을 단풍 길에는 이면우 시인의 ‘그 젖은 단풍나무’ 덕분에 몸보다 마음이 먼저 붉어지고, 그 어느 해보다 발걸음도 유순해질 것 같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아주 오래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젖은 숲에서 타는 혀를 온몸에 매단 그 단풍나무,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물먹은 포풀린 쫘악 찢는 외마디 새 울음, 젖은 숲 젖은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살면서 문득 그 단풍나무를 떠올린다 저 혼자 붉은 단풍나무처럼 누구라도 마지막엔 외롭게 견뎌내야 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라 생각했다 그대 바로 지금, 느닷없이 고통의 전면에 나서고 이윽고 여울 빠른 물살에 실린 붉은 잎사귀,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초록 숲이지만 그 속엔 단풍나무가 있고 때론 비 젖은 잎, 여윈 손처럼 내밀었다 아주 오래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말없음표 같은 빗방울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내미는 낯선 손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아직 몰랐다 다만 여름 숲은 초록빛이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그 젖은 단풍나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고통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
이렇게 살다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자신의 세운 두 무릎 사이에 피곤한 이마를 묻을 때 감은 눈 속 따스히 밝히는 한 그루 젖은 단풍나무를 보리라.
지금이 꼭 가을이 아니라도.
* 이면우 : 1951년 대전 출생. 중학교 졸업 후 보일러공으로 일하다가 마흔 살 넘어 시 쓰기 시작. 시집 『저 석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십일월을 만지다』 등 출간. 노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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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우 시인은 문단에서 ‘보일러공 시인’으로 불립니다. 그의 시는 보일러실처럼 뜨겁다가 비 내리는 숲속의 젖은 단풍나무처럼 서늘하기도 합니다. 시 속에 불과 물의 이미지가 함께 담겨 있지요.
그가 시인이 된 과정부터 특이합니다. 남들처럼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통하지 않고 40세에 시집을 출간하는 방법으로 문단에 나왔죠. 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뒤 공사판을 떠돌다가 어느 날 문득 시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마흔에 식구들 몰래 시를 쓰다
대청호 옆 오두막에서 버섯농사를 짓던 어느 해, 그는 큰형이 보내준 박용래 시집 『먼 바다』를 읽다가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감성의 부싯돌을 발견했습니다. 시가 너무나 좋아서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지요. 밤새워 시를 읽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던 그는 드디어 식구들 몰래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그렇게 쓴 시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등단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딱히 시인이 되는 길을 알지 못했지요. 급기야 주변 사람들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그 덕분에 1991년 첫 시집 『저 석양』을 냈는데, 시인의 약력에는 ‘학력 별무, 건축배관공’이라고 썼지요. 그때 시집에 붙인 ‘시인의 말’이 뭉클합니다.
‘나는 이 속의 어떤 시편을 줄줄 울면서 썼다. 천 권의 책 읽기를 끝낸 네 해 전 나는 생물도감, 느타리버섯 기르기, 원예사전 각 한 권씩을 이삿짐에 꾸려 넣고 여편네를 앞세워 마침 진눈깨비 내리던 이 호숫가 오두막으로 왔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보다 원초적이다. 사람의 사는 일이 이리도 풍성한 은총 속에 있음을 내 이곳에서 체득하였다.’
이처럼 그의 시에는 ‘줄줄 울면서’ 쓴 슬픔과 먹고살기 위해 준비한 생물도감과 버섯 기르는 방법과 호숫가 오두막에서 체득한 사람 사는 일의 풍성한 은총이 동시에 배어 있습니다. 오래전 ‘젖은 숲에서 타는 혀를 온몸에 매단 그 단풍나무’를 만난 이후로 그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루 20㎞씩 남하하는 단풍 행렬
이제는 ‘말없음표 같은 빗방울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던 숲에서 ‘두 무릎 사이에 피곤한 이마를 묻을 때 감은 눈 속 따스히 밝히는 한 그루 젖은 단풍나무를 보리라’는 예감에 스스로 단풍이 되고 붉은 잎이 되기도 하지요.그의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 단풍이 천지를 물들이고 있습니다. 단풍 물이 든 가을 숲에서는 마음이 순해집니다. 바알간 잎을 만져 보면 금세 손바닥에 단물이 묻어날 것 같지요. 요즘 산과 들은 어딜 가든 아름답습니다. 형형색색의 물감을 뿌린 만산홍엽의 계절이니까요.
당단풍 나무가 많은 설악산의 대청봉을 빨갛게 적신 물감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동안 산에 든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붉어집니다. 활엽수종에 뒤덮인 오대산은 오렌지색과 노란색으로 빛나고, 내장산에서 만나는 갓난아이 손 같은 ‘애기단풍’도 더없이 이쁩니다.
지리산 피아골의 연주담~통일소~삼홍소 구간 또한 가을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곳의 삼홍(三紅)은 온 산이 붉게 타서 산홍,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쳐서 수홍, 그 품에 안긴 사람이 붉어서 인홍이라고 하더군요. 경북 청송 주왕산과 전남 해남 두륜산, 경기 포천 국립수목원, 가평 아침고요수목원, 강원 홍천 은행나무숲도 단풍 명소이지요.
단풍은 하루 20~25㎞ 속도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달립니다. 올가을 단풍 길에는 이면우 시인의 ‘그 젖은 단풍나무’ 덕분에 몸보다 마음이 먼저 붉어지고, 그 어느 해보다 발걸음도 유순해질 것 같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