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서 '간신 대통령' 안뽑으려면
◆ 매경 포커스 ◆
정치의 계절이 왔다. '위드 코로나'와 함께 '위드 폴리틱스'다. 저마다 입장과 생각은 다르지만, 얼마 뒤에 우리 손으로 누구를 뽑느냐에 따라 우리들 각자와 나라 전체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중대하면서도 어려운 시간, 과거에는 어땠을까? 왕조 시대에도 사람 뽑는 일을 놓고 이처럼 고민하고, 선택의 결과가 국운을 좌우했을까?
"간신과 충신을 구분해야 한다!"
왕조 시대에 정치를 잘하기 위한 지침으로 손꼽히는 게 이런 변간(辨奸)이었다. 간신이란 짐짓 충신인 양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원칙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사유화하며, 국가의 기반 자체를 흔드는 원흉이다.
따라서 '그런 간신을 일찌감치 찾아내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 잘못해서 충신을 제쳐두고 간신을 뽑아 버리면 두고두고 손해가 크다!'는 것이다. 그렇게 변간의 중요성이 누누이 강조되었음에도, 시대마다 간신은 등장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기본적으로 간신이란 전제군주 제도의 산물이다. 먼저 모든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군주가 무슨 일로 넋이 빠지거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을 때 간신이 기회를 잡는다. 백제 중기의 도림은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에 파견한 첩자였다. 그는 단지 정보만 빼내서 고구려에 알려줄 뿐 아니라,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해 그를 완전히 홀렸다. 개로왕은 매일 도림과 바둑을 두며 국정을 소홀히 했고, 고구려는 곧 망할 거라는 도림의 말만 믿고 자기 나라가 망해가는 줄 몰랐다. 그러기를 3년이 흐른 475년, 마침내 백제라는 나라의 도낏자루가 썩을 대로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게 되자, 도림은 장수왕에게 때가 되었다고 알렸다. 지체 없이 쳐들어온 고구려군은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했고, 개로왕은 목숨을 잃었다. 백제 자체도 멸망할 뻔했고, 한강 유역을 잃어버린 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조선 중기의 윤원형은 왕이 어리고 대비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상황을 이용했다. 문정왕후가 사실상의 왕이고 자신은 그의 동생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부패와 사치의 끝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청탁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이 가져온 뇌물이 차고 넘쳐 저택 앞에 시장을 열었으며, 윤원형 개인에게 바칠 뇌물을 지방에서 싣고 오는 배가 정기적으로 운항했다. 결국 그가 1501년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자, 훈척 정치에 질려 버린 조선은 사대부들이 국정을 좌우하는 나라로 바뀌어갔다. 그 정착 과정에서 당쟁이 일어났고, 왜란과 호란이 찾아왔다.
한편 군주가 자신의 권력을 되찾거나 강화하기 위해 간신을 이용하기도 한다. 고려 말, 공민왕은 아무 배경도 연줄도 없는 신돈을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세상을 떠나 초연한 사람)'이라며 발탁해서 그에게 나라를 뒤흔들 권력을 주었다.
1365년,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를 비롯해서 겸직, 겸직, 겸직으로 신돈에게 붙은 직책명은 총 50글자가 넘었다. 그리고 신돈을 앞세워 권문세족들이 겸병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그 세력을 억눌렀다. 귀족 자제들이 독점했던 관료기구도 새롭게 고쳤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개혁에 대한 반발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자, 신돈이 사치와 음란에 빠졌다 하여 모든 지위를 뺏고 유배 보냈다가 끝내 죽였다. 신돈의 뒤에 숨어서 왕권을 강화하고, 그 때문에 날아온 화살은 신돈이 온통 맞도록 한 셈이다.
조선 후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776년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쓴 채 왕위에 올랐다. 노회한 노론 대신들로 조정이 채워져 있기도 했다. 이토록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그는 오랜 심복 내지는 친구였던 홍국영을 내세운다. 도승지와 약방제조를 맡겨 밤낮으로 임금을 대해 볼 수 있도록 하고, 훈련대장이며 숙위대장, 중영대장 등도 맡겨 사실상 병권의 대부분을 한 손에 쥐도록 했다. 거기다 비변사, 선혜청, 홍문관 등 거의 모든 행정기관의 실무도 겸직하게 함으로써, 정승이 아니면서 정승을 한참 뛰어넘는 권력을 갖도록 한 것이다. 정조는 홍국영을 통해 대궐 안팎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알 수 있었고, 그에 맞게 대책을 세우고 지시를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서거나 맞선다는 의심이 가던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그렇지만 나는 새도 떨어트릴 지경이던 홍국영의 권세는 3년 남짓이었다.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앉혔지만, 그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중궁전의 음모라며 소란을 피웠다. 다음 후궁을 들이자는 말에도 화를 내며 닥치라고 했다. 그리하여 '중궁전에 무례했으며, 왕실의 후손을 얻는 일을 방해했다' 하여 하루아침에 사실상의 유배에 처해지고, 얼마 뒤 의문사를 당한다. 죽은 다음에도 그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부관참시까지 겪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군주가 필요에 따라 '만든 간신' 역시 군권을 농단한 간신이나 마찬가지로 정치와 역사에 피해를 입혔다. 신돈이나 홍국영이 벌인 일의 뒷배가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고, 그토록 신임하던 사람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모습을 보며 충성심이 생길 까닭이 없었다. 공민왕은 말년을 혼란스럽게 보내다 암살되며, 이후 우왕, 창왕의 정통성마저 '신돈의 핏줄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게 되면서 고려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정조의 탕평정치 역시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비교적 일찍 죽고 난 뒤의 조선은 세도정치 시대라는 조선 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대로 진입한다.
왕의 힘이 제대로 쓰이지 못할 때, 간신은 등장한다. 그렇다면 왕이 사라진 지금은 간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군주 대신 국민이 주권자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주권자 국민이 매우 강력한 통치권을 위임하는 대통령은 왕권을 대신하는 강력한 신하에 비길 만하다. 그렇다면 그런 대통령도 국민에 대하여 '충신'일 수 있고, '간신'일 수도 있다.
과거의 간신들이 군주의 태만이나 무능을 이용해 등장했듯, 주권자 국민이 자신들을 대신해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을 신중하게 뽑지 않고 얄팍한 감성이나 이미지에 휘둘리면 '간신 대통령'이 등장할 수 있다. 미국 제29대 대통령 워런 하딩은 얼굴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당시 민주당은 민심을 잃었고 공화당은 인물난인 상황에서 누가 봐도 천하의 미남인 그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는데, 1920년 대선에서 60.3%라는 사상 최고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가 백악관에서 한 일은 금주법 상황에서 압수한 술 퍼마시기, 거액의 도박판 벌이기, 그리고 내연녀들을 백악관에 끌어들여 정사 벌이기 등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장관과 측근들은 티포트 돔 스캔들을 비롯한 각종 부정부패로 국가를 거의 말아먹을 지경까지 몰았다. 당선되고 2년여 만에 그가 심장마비로 숨진 일은 미국 국민에게는 축복이었다고 할까. 이후 그는 그 어떤 여론조사에서도 역대 최악의 미국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1848년 프랑스 사상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은 이름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피를 받았다고는 하나 닮은 점은 눈 씻고 봐도 없었는데, 프랑스의 정국이 7월혁명과 2월혁명을 거치며 살벌한 계급 대립과 폭력으로 지쳐 버린 국민들은 나폴레옹 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입에 달게 되었다. 이런 나폴레옹 향수에 편승하여, 재능도 인물도 변변치 않았던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4년 만에 민주주의를 짓밟고 황제가 된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대 나폴레옹의 길을 따른 셈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기대를 건 서민들을 배반하고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펴는가 하면, 무리한 해외 원정을 거듭하다가 끝내 프로이센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 뒤로 프랑스인들은 황제고 왕이고 지긋지긋해져서 다시는 군주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주권자 국민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저쪽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 '거대한 악의 세력에 상대하려면 이런 인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던진 표가 간신 대통령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현대 아프리카를 대표할 만한 독재자는 우간다의 '인간 백정' 이디 아민이다. 그는 1966년에 밀턴 오보테를 위해 쿠데타를 했고, 다시 1971년에 오보테를 상대로 한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 뒤 그가 벌인 온갖 악행과 만행에 우간다인들은 치를 떨었고, 마침내 1978년에 아민이 탄자니아를 침공하자 우간다인들은 오히려 탄자니아군과 합세하여 아민을 내몰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1980년 선거에서 우간다 국민은 탄자니아에 망명해 있다 돌아온 오보테와 그의 우간다인민회의에 표를 몰아줬다. 오보테가 훌륭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1966년에 집권한 뒤 벌인 학정이 아민의 쿠데타를 뒷받침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민에게 질린 우간다 국민은 그의 라이벌이라 여겨진 오보테를 밀어준 것이다. '누가 해도 아민보다야 나을 테니까!' 그리고 곧 그것은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아민의 잔당들이 무장봉기를 하자, 오보테는 군대에 반군과 양민을 가리지 않고 집단 학살과 약탈, 강간을 명령했다. 결국 '그놈이 그놈'이라는 결론과 함께 오보테는 1986년에 다시 쿠데타로 쫓겨난다.
같은 결과로, 1932년 독일에서 현대 민주주의 사상 최악의 선거가 치러졌다. 히틀러와 그가 이끄는 나치당이 제1당의 자리를 굳히고, 그에 따라 히틀러가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광인이었던 그는 독일이 겪고 있던 모든 문제를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보기에 사회주의 세상이 되는 것보다는 히틀러가 나았고, 노동자들이 보기에 전통적 극우의 집권보다는 히틀러가 나았다. 군부와 왕당파 등도 나름대로의 판단에서 히틀러를 밀었다. 그 결과 총리가 되고, 1년쯤 뒤 대통령도 겸하여 총통이 된 히틀러는 그들 모두를 배반했다. 히틀러를 찍었던 사람들 상당수가 '유대인의 피가 아주 약간이지만 섞여 있다'는 이유로 수용소로, 가스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세계는 전쟁의 늪에 빠졌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어떻게 현대에도 정치의 그림자에 숨어 있는 간신의 망령을 없애버릴 것인가. 정책과 이념을 보고 투표해야 한다. 후보자 개인을 보더라도 그의 내실 있는 비전을 보고 투표해야 한다. 막연한 이미지, 얕은 감성, 실체도 없는 '거악'의 승리보다는 낫다는 심정으로 고귀한 한 표를 시궁창에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왕이 아니지만 왕의 자리에 있는, 그 자리를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민주 시민의 책임이다.
[함규진 서울교대 교수·'공정하다는 착각' 역자]
정치의 계절이 왔다. '위드 코로나'와 함께 '위드 폴리틱스'다. 저마다 입장과 생각은 다르지만, 얼마 뒤에 우리 손으로 누구를 뽑느냐에 따라 우리들 각자와 나라 전체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중대하면서도 어려운 시간, 과거에는 어땠을까? 왕조 시대에도 사람 뽑는 일을 놓고 이처럼 고민하고, 선택의 결과가 국운을 좌우했을까?
"간신과 충신을 구분해야 한다!"
왕조 시대에 정치를 잘하기 위한 지침으로 손꼽히는 게 이런 변간(辨奸)이었다. 간신이란 짐짓 충신인 양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원칙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사유화하며, 국가의 기반 자체를 흔드는 원흉이다.
따라서 '그런 간신을 일찌감치 찾아내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 잘못해서 충신을 제쳐두고 간신을 뽑아 버리면 두고두고 손해가 크다!'는 것이다. 그렇게 변간의 중요성이 누누이 강조되었음에도, 시대마다 간신은 등장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 왕의 자리가 무게를 잃으면?
기본적으로 간신이란 전제군주 제도의 산물이다. 먼저 모든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군주가 무슨 일로 넋이 빠지거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을 때 간신이 기회를 잡는다. 백제 중기의 도림은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에 파견한 첩자였다. 그는 단지 정보만 빼내서 고구려에 알려줄 뿐 아니라,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해 그를 완전히 홀렸다. 개로왕은 매일 도림과 바둑을 두며 국정을 소홀히 했고, 고구려는 곧 망할 거라는 도림의 말만 믿고 자기 나라가 망해가는 줄 몰랐다. 그러기를 3년이 흐른 475년, 마침내 백제라는 나라의 도낏자루가 썩을 대로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게 되자, 도림은 장수왕에게 때가 되었다고 알렸다. 지체 없이 쳐들어온 고구려군은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했고, 개로왕은 목숨을 잃었다. 백제 자체도 멸망할 뻔했고, 한강 유역을 잃어버린 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조선 중기의 윤원형은 왕이 어리고 대비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상황을 이용했다. 문정왕후가 사실상의 왕이고 자신은 그의 동생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부패와 사치의 끝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청탁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이 가져온 뇌물이 차고 넘쳐 저택 앞에 시장을 열었으며, 윤원형 개인에게 바칠 뇌물을 지방에서 싣고 오는 배가 정기적으로 운항했다. 결국 그가 1501년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자, 훈척 정치에 질려 버린 조선은 사대부들이 국정을 좌우하는 나라로 바뀌어갔다. 그 정착 과정에서 당쟁이 일어났고, 왜란과 호란이 찾아왔다.
◆ 만들어진 간신들
한편 군주가 자신의 권력을 되찾거나 강화하기 위해 간신을 이용하기도 한다. 고려 말, 공민왕은 아무 배경도 연줄도 없는 신돈을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세상을 떠나 초연한 사람)'이라며 발탁해서 그에게 나라를 뒤흔들 권력을 주었다.
1365년,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를 비롯해서 겸직, 겸직, 겸직으로 신돈에게 붙은 직책명은 총 50글자가 넘었다. 그리고 신돈을 앞세워 권문세족들이 겸병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그 세력을 억눌렀다. 귀족 자제들이 독점했던 관료기구도 새롭게 고쳤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개혁에 대한 반발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자, 신돈이 사치와 음란에 빠졌다 하여 모든 지위를 뺏고 유배 보냈다가 끝내 죽였다. 신돈의 뒤에 숨어서 왕권을 강화하고, 그 때문에 날아온 화살은 신돈이 온통 맞도록 한 셈이다.
조선 후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776년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쓴 채 왕위에 올랐다. 노회한 노론 대신들로 조정이 채워져 있기도 했다. 이토록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그는 오랜 심복 내지는 친구였던 홍국영을 내세운다. 도승지와 약방제조를 맡겨 밤낮으로 임금을 대해 볼 수 있도록 하고, 훈련대장이며 숙위대장, 중영대장 등도 맡겨 사실상 병권의 대부분을 한 손에 쥐도록 했다. 거기다 비변사, 선혜청, 홍문관 등 거의 모든 행정기관의 실무도 겸직하게 함으로써, 정승이 아니면서 정승을 한참 뛰어넘는 권력을 갖도록 한 것이다. 정조는 홍국영을 통해 대궐 안팎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알 수 있었고, 그에 맞게 대책을 세우고 지시를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서거나 맞선다는 의심이 가던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그렇지만 나는 새도 떨어트릴 지경이던 홍국영의 권세는 3년 남짓이었다.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앉혔지만, 그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중궁전의 음모라며 소란을 피웠다. 다음 후궁을 들이자는 말에도 화를 내며 닥치라고 했다. 그리하여 '중궁전에 무례했으며, 왕실의 후손을 얻는 일을 방해했다' 하여 하루아침에 사실상의 유배에 처해지고, 얼마 뒤 의문사를 당한다. 죽은 다음에도 그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부관참시까지 겪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군주가 필요에 따라 '만든 간신' 역시 군권을 농단한 간신이나 마찬가지로 정치와 역사에 피해를 입혔다. 신돈이나 홍국영이 벌인 일의 뒷배가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고, 그토록 신임하던 사람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모습을 보며 충성심이 생길 까닭이 없었다. 공민왕은 말년을 혼란스럽게 보내다 암살되며, 이후 우왕, 창왕의 정통성마저 '신돈의 핏줄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게 되면서 고려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정조의 탕평정치 역시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비교적 일찍 죽고 난 뒤의 조선은 세도정치 시대라는 조선 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대로 진입한다.
왕의 힘이 제대로 쓰이지 못할 때, 간신은 등장한다. 그렇다면 왕이 사라진 지금은 간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군주 대신 국민이 주권자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주권자 국민이 매우 강력한 통치권을 위임하는 대통령은 왕권을 대신하는 강력한 신하에 비길 만하다. 그렇다면 그런 대통령도 국민에 대하여 '충신'일 수 있고, '간신'일 수도 있다.
◆ 얼굴로, 이름으로 대통령이 되다
과거의 간신들이 군주의 태만이나 무능을 이용해 등장했듯, 주권자 국민이 자신들을 대신해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을 신중하게 뽑지 않고 얄팍한 감성이나 이미지에 휘둘리면 '간신 대통령'이 등장할 수 있다. 미국 제29대 대통령 워런 하딩은 얼굴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당시 민주당은 민심을 잃었고 공화당은 인물난인 상황에서 누가 봐도 천하의 미남인 그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는데, 1920년 대선에서 60.3%라는 사상 최고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가 백악관에서 한 일은 금주법 상황에서 압수한 술 퍼마시기, 거액의 도박판 벌이기, 그리고 내연녀들을 백악관에 끌어들여 정사 벌이기 등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장관과 측근들은 티포트 돔 스캔들을 비롯한 각종 부정부패로 국가를 거의 말아먹을 지경까지 몰았다. 당선되고 2년여 만에 그가 심장마비로 숨진 일은 미국 국민에게는 축복이었다고 할까. 이후 그는 그 어떤 여론조사에서도 역대 최악의 미국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1848년 프랑스 사상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은 이름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피를 받았다고는 하나 닮은 점은 눈 씻고 봐도 없었는데, 프랑스의 정국이 7월혁명과 2월혁명을 거치며 살벌한 계급 대립과 폭력으로 지쳐 버린 국민들은 나폴레옹 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입에 달게 되었다. 이런 나폴레옹 향수에 편승하여, 재능도 인물도 변변치 않았던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4년 만에 민주주의를 짓밟고 황제가 된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대 나폴레옹의 길을 따른 셈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기대를 건 서민들을 배반하고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펴는가 하면, 무리한 해외 원정을 거듭하다가 끝내 프로이센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 뒤로 프랑스인들은 황제고 왕이고 지긋지긋해져서 다시는 군주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거악' 대신 선택한 '차악' 그러나!
주권자 국민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저쪽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 '거대한 악의 세력에 상대하려면 이런 인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던진 표가 간신 대통령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현대 아프리카를 대표할 만한 독재자는 우간다의 '인간 백정' 이디 아민이다. 그는 1966년에 밀턴 오보테를 위해 쿠데타를 했고, 다시 1971년에 오보테를 상대로 한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 뒤 그가 벌인 온갖 악행과 만행에 우간다인들은 치를 떨었고, 마침내 1978년에 아민이 탄자니아를 침공하자 우간다인들은 오히려 탄자니아군과 합세하여 아민을 내몰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1980년 선거에서 우간다 국민은 탄자니아에 망명해 있다 돌아온 오보테와 그의 우간다인민회의에 표를 몰아줬다. 오보테가 훌륭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1966년에 집권한 뒤 벌인 학정이 아민의 쿠데타를 뒷받침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민에게 질린 우간다 국민은 그의 라이벌이라 여겨진 오보테를 밀어준 것이다. '누가 해도 아민보다야 나을 테니까!' 그리고 곧 그것은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아민의 잔당들이 무장봉기를 하자, 오보테는 군대에 반군과 양민을 가리지 않고 집단 학살과 약탈, 강간을 명령했다. 결국 '그놈이 그놈'이라는 결론과 함께 오보테는 1986년에 다시 쿠데타로 쫓겨난다.
같은 결과로, 1932년 독일에서 현대 민주주의 사상 최악의 선거가 치러졌다. 히틀러와 그가 이끄는 나치당이 제1당의 자리를 굳히고, 그에 따라 히틀러가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광인이었던 그는 독일이 겪고 있던 모든 문제를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보기에 사회주의 세상이 되는 것보다는 히틀러가 나았고, 노동자들이 보기에 전통적 극우의 집권보다는 히틀러가 나았다. 군부와 왕당파 등도 나름대로의 판단에서 히틀러를 밀었다. 그 결과 총리가 되고, 1년쯤 뒤 대통령도 겸하여 총통이 된 히틀러는 그들 모두를 배반했다. 히틀러를 찍었던 사람들 상당수가 '유대인의 피가 아주 약간이지만 섞여 있다'는 이유로 수용소로, 가스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세계는 전쟁의 늪에 빠졌다.
◆ 민주 시민의 책임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어떻게 현대에도 정치의 그림자에 숨어 있는 간신의 망령을 없애버릴 것인가. 정책과 이념을 보고 투표해야 한다. 후보자 개인을 보더라도 그의 내실 있는 비전을 보고 투표해야 한다. 막연한 이미지, 얕은 감성, 실체도 없는 '거악'의 승리보다는 낫다는 심정으로 고귀한 한 표를 시궁창에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왕이 아니지만 왕의 자리에 있는, 그 자리를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민주 시민의 책임이다.
[함규진 서울교대 교수·'공정하다는 착각' 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