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대중화, 공동체 모두가 성찰해볼 때 됐다”

 


박찬수의 직선 - 여성학자 정희진

여성군인 극단선택, 한국 나아진 것 없다는 징표
남성 문화, 성폭력 현실에 너무 무지해
내가 대통령이면 별 십수개 떨어뜨렸을 것

젠더는 모든 남성의 문제, 현 정부도 다를 게 없다
그런데도 도덕적 우월감·자부심에 빠져
젊은 여성들 인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아래선 남녀 격차보다
남-남, 여-여 격차가 더 심해져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박찬수 선임논설위원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젠더 이슈를 피해서는 어떤 담론이나 정책을 얘기할 수 없고, 정치를 이끌어 갈 수 없는 시대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미투와 유력 진보 정치인들의 잇단 성폭력 사건이 드러났고,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여성의 집단적인 목소리가 표출했다. 한편에선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젊은 남성들의 주장이 정치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씨를 만난 건 이런 현상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가 2005 년 펴낸 <페미니즘의 도전>은 세 차례 개정판을 내며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 운동의 전환과 확산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기지가 됐다.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 공동체에, 전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지성을 제공한다” 는 이 책의 머리말은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정말 우리 사회 전체에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불러왔다. 그는 지금 변화의 물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요 몇년 새 젠더 문제가 가장 중요한 정치, 사회적 담론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한단계 앞으로 전진했다고 평가하십니까?

젠더 이슈가 가시화됐다고 하지만, 워낙에 이게 드러나지 않는 문제라 정확한 상황 파악이 힘들어요. 예를 들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됐다, 이걸 지표화하거나 통계화하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거죠.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통계는 있는데, 대부분 여성들은 (통계가 잡히지 않는) 5인 이하 사업장이나 비정규직, 파트타임 쪽에서 일을 하죠. 또 공적 영역에서 지위가 높아도 그게 사적 영역으로 연결되지는 않죠.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 노동을 하거나 더 겸손을 강요받거나 하고 있죠. 미국에서 경제적 지위가 높고 교육 수준이 높은 (여성) 그룹하고 그렇지 않은 그룹하고 가정폭력 발생률을 비교했는데, 똑같았다는 조사결과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젠더 문제가 가시화했지만, 일단 그건 반가운 일이죠,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갔냐’고 물으면 복잡한 예스라고 대답하고 싶어요, ‘복잡한 예스’ 죠.

흔히 젠더 갈등이라고 말하는데, 젠더 갈등이 아니라, 성차별이죠. 예를 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갈등을 일으키나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있는 거죠. ‘갈등’이 아니라 ‘차별’이죠. 요즘 ‘여성 혐오’ ‘남성 혐오’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걸 마치 대칭적인 개념인 것처럼 쓰는데, 어디 ‘흑인 차별’과 ‘백인 차별’이 같은 말일 수 있을까요? 남성 문화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나아졌을까요? 서울 중심의 중산층 이상 여성의 이미지가 과잉 재현된 것은 아닐까요? 그 점에서 저는 나아졌다고 말하기 힘들어요.

여전히 남성들은 남성 문화의 혜택을 공유하면서 자기는 아니라고 말해요. 재밌는 통계가 있는데, 프랑스에서 성폭력 가해자 처벌을 강화하자고 했더니 남성들이 여성보다 더 세게 처벌해야 한다고 대답했대요. 그 이유는 (성폭력 가해자를) 자신과 분리하는 거죠. 성폭력이 어떤 면에서는 규범이에요,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차별의 규범, 가부장제 사회가 허용한 어떤 문화라는 거죠. 나는 아니고 쟤처럼 어떤 일탈적인 사람이 문제다 라는 식이죠. 한번 생각해보세요. 요 몇년간 성폭력 사건으로 사회가 뒤집어졌는데도, 지금도 육·해·공군 가릴 거 없이 매일 일어나잖아요? 군대를 보면 (한국사회가 젠더 문제에서) 나아졌다고 얘기할 수가 없어요.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은 공기 같은 거예요. 그런데 대통령이나 국방부 장관은 이걸 인식하지 못해요. 내가 대통령이나 장관이라면, 여군 부사관 자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먼저 별 십수개는 떨어뜨리고 (사태 수습을) 시작했을 거예요. 우리 사회 남성 리더들은 성폭력의 현실에 너무 무지합니다.”

그런데 요즘 20대 남성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여성에게 차별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성 세대 때는 여성 차별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역차별이 있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20대 남성층에서 보수정당 지지율이 매우 높게 나오는 건 이런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그거는 정답이 분명해요. 20대 남성을 억압하는 사람들은 같은 남성들이죠. 우리나라에는 세 개의 카스트가 있어요, 군대를 안 가도 되는 사람, 군대에 끌려가는 사람, 군대를 못 가는 사람. 첫 번째는 상층 남자고 두 번째는 일반 남자죠. 세 번째는 여성과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여성과 장애인이 일반 남자를 군대 보낸 게 아니잖아요. 남성과 남성의 문제인데, 그걸 젠더 문제로 돌려버린 거죠. 지금의 갈등은 사실 흙수저 젊은 남성하고 금수저 중년 남성 간의 갈등이에요, 금수저 젊은 남성이 (군대 안 가는 특권을) 세습하는 거니까요. 이건 세대 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죠. 그러니까 20대 남성이 싸워야 할 대상은 50대 금수저 남성이지 자기 동료가 아니고 여성은 더더욱 아니라는 거죠.”

가령 2018년 발생한 ‘이수역 폭행 사건’을 보면, 처음엔 여성혐오 사건으로 알려졌는데 경찰 발표를 보니까 여성이 남성에게 먼저 심한 말을 한 게 발단이 됐거든요. 20대 남성의 페미니즘 혐오는 물론 문제지만, 일부 젊은 여성의 남성비하 언어도 문제를 악화시키는 한 요인이 아닐까요?

이수역 사건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해요. 한 가지 해석은, 드물긴 하지만 여성들이 방어적으로 먼저 때리는 경우가 있어요. 가정폭력에서도 여성들이 계속 맞다 보니까 방어하는 차원에서 먼저 ‘도발하는’ 사례가 있어요. 그래서 처음에 저는 이수역 사건도 여성들이 겁을 먹으니까 먼저 폭력을 행사한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나중에 (경찰 발표를) 보니 꼭 그렇진 않더라구요.

이건 시대적인 경험 차이가 나는 거 같아요. 성차별은 인류 문명의 동력이었습니다. 여성들이 지금까지 피해를 본 건 맞죠,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바꾸자는 거지 누적적 보상을 요구하는 건 아니거든요. 가령 일제 때 일본이 군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했다고 해서 우리도 일본 여성들에게 똑같이 하자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잖아요. 마찬가지로 남성들에게 한남충이라든지 (비하) 발언을 하는 건 잘못된 거죠. 피해와 피해 정체성은 다릅니다. 내가 피해를 당했으면 그 피해에 관해 얘기를 해야지, 그걸 자기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피폐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 자신도 그렇지만, 피해자 정체성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게 신자유주의와 관련이 있어요. 신자유주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피해자의 시대예요.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란 게 비윤리적이고 각자도생을 부추기니까, 이 시대에 유일한 도덕적 주체는 피해자예요. 모든 사람이 다 피해자가 되려고 하고, 누가 더 심한 피해를 입었나 하는 경쟁을 하죠. (젠더 문제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남성 문화에 여성이 저항하는 것과 개별 남성을 (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다른 거죠. 그런 게 요즘 젊은 여성들한테서 좀 보이는 측면이 있는 거 같아, 우려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해 숙명여대 사건에도 충격을 받았어요. 트랜스젠더 여성이 입학하는데 서울시내 6개 여대 21개 단체가 반대 성명을 냈잖아요. 모든 여대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온 거예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서 위험하다는 건데, 오히려 그런 생각이 위험한 겁니다. 이런 걸 보면서 저는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꼭 바람직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페미니즘이 급속하게 대중화되었는데, 이건 반가운 현상이지만 다소 우려스러운 측면도 있어요.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났으니까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의식이 강한데, 그런 의식이 온라인 문화하고 결합했을 때 일종의 ‘도그마’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거든요. (페미니즘이 대중화하면서) 트랜스젠더나 성소수자, 가난한 남성을 혐오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거죠.”

―페미니즘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전세계적으로 비슷한 현상인가요?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있긴 한데, 한국이 특히 심하다고 봅니다. 지금 여성운동의 최전선이 한국이에요. 한국만큼 미투가 활발한 데가 없어요. 다른 데에도 (래디컬한) 여러 페미니즘이 있죠.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라는 우익 페미니즘도 있고, 여성이 권력을 갖기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파워 페미니즘도 있어요. 그런데 한국처럼 난민을 반대하고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페미니즘은 전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사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놀라운 현상입니다.”

정희진씨 자택 책장에 꽂힌 정희진씨가 쓴 책들. 대표작인 <페미니즘의 도전> 초판과 개정판이 나란히 꽂혀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여성 혐오’하고 ‘페미니즘에 반대한다’는 건 결과적으로 같은 말인가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말(단어)이 엄청나게 오용되고 있는데, 여성 혐오는 일종의 타자에 대한 혐오입니다. 이주민, 탈북자, 성소수자를 싫어한다든가…. 자신을 중심에 놓고 타자를 배제하려는 편견이죠. 그런데 이 용어를 쓰니까 대칭해서 ‘남성 혐오’란 단어도 쓰이고 있어요. 사실 ‘남성 혐오’는 원래 없는 말이고 불가능한 말인데, 지금은 그게 실천이 되고 있는 거죠. ‘페미니즘에 반대한다’는 건 무슨 페미니즘에 반대한다는 건지, 일단 페미니즘이 엄청나게 다양하거든요. 페미니즘의 핵심은 다양성이에요. 왜냐하면 여성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슬람 여성, 백인 여성, 아시안 여성 등 모든 집단에 여성이 있으니까 (페미니즘도) 다양할 수밖에 없죠. 어떨 때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옳고, 어떨 때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옳고, 어떤 문제는 탈식민주의로 접근해야 하고…. 인구가 70억명이면 70억개의 페미니즘이 있는 거예요.

요즘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이 있잖아요, 의미 있는 운동이지만, 이 역시 여성의 위치에 따라 효과가 다르거든요. 나이든 여성이나 장애 여성이 ‘추레하면’ 현실적으론 더 차별받죠. 그러니 ‘페미니즘에 반대한다’는 건 모든 페미니즘을 하나로 보는 거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거죠. 서구에서 한국, 중국, 일본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은 동양인으로 보는 것도 일종의 차별이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신자유주의 아래선 남녀 간 격차보다 남-남, 여-여 간 격차가 심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 대중화가 어떤 식으로 바람직하게 갈 것이냐는 공동체의 역량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 역량이 여성주의도 그렇고 한국사회도 매우 부족해서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 부분을 우리 모두가 성찰해볼 시점이라고 봐요.”

―문재인 정부 출범 무렵에 어느 강연에서, 문재인 정부의 약점은 젠더 문제가 될 거라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현 정부의 정치적 위기가 젠더 문제에서 비롯했거나 가속화한 건 맞는 거 같습니다. 당장 민주당이 참패한 4·7 재보궐선거가 상징적 사례죠. 젠더 사안에서 문재인 정부의 어떤 점이 문제였을까요?

도덕적 우월감과 자부심이죠. 젠더는 어느 사회에서나 모든 남성의 정치적 문제인데, 이 정부에는 도덕적 우월감이 있었어요. 진보나 보수나 여성 문제에선 별 차이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젊은 여성들의 감수성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여성들의) 의식은 저만치 올라와 있는데도 (진보적인) 남성들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요. 촛불을 보세요, 처음에 시작은 미미했죠. 그런데 정유라씨가 이화여대에 부정입학 하고 학점을 부당하게 잘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젊은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이게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기폭제죠. 촛불을 댕긴 게 젊은 여성들인 겁니다. 촛불 집회에 여성들이 많이 참여하니까, 젊은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고 참석하니까, 촛불이 비폭력으로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겁니다. 사회가 격변하면 그걸 가장 먼저 느끼는 집단이 10대하고 젊은 여성입니다. 자기 미래가 달렸으니까요.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그런 걸 몰라도 너무 몰라요. 탁현민 논란부터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시장 사건까지, 인식이 없기 때문에 펑펑 터지는데도 감당을 못 한 거죠. 물론 보수 인사들은 논외입니다.(웃음)”

―여성가족부 논란을 어떻게 보십니까? 국민의힘에선 집권하면 폐지하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명칭을 양성평등부로 바꾸자는 주장도 나옵니다.

여성가족부는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문제는, 작은 조직일수록 장관이 누가 가느냐에 따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겁니다. 국회의원이 장관 경력 하나 쌓으려고 가거나, 대통령이 친한 사람한테 선심 쓰듯이 장·차관을 임명하면 정말 헌신적으로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만 고통을 받는 거죠. 명칭을 바꾸는 문제는, 바꿀 수도 있는데 양성평등부는 아니죠. 양성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간성(inter-sexual)도 있고 트랜스젠더도 있고… 영어 명칭이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니까 번역하면 성평등부가 맞죠.”

―젠더 이슈가 떠오르면서 징병제인 우리나라 병역 제도를 모병제(볼런티어 제도)로 바꾸자거나, 남녀 모두 군대에 가자는 주장도 나옵니다. 이건 어떻게 보시나요?

징병 문제는 국가정책 차원에서 논의를 시작해야지 젠더 문제로 접근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의 접근은 징병제가 갖고 있는 또다른 모순을 오히려 은폐할 수 있거든요. 가령 한국이 징병제를 채택한 가장 큰 이유는 60만 대군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인데, 꼭 그렇게 많은 병사가 필요한 걸까 생각해 봐야죠. 한국에 60만명의 군인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북한 때문만은 아니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한-미 동맹이란 틀과 떼려야 뗄 수가 없죠. 따라서 병역제도 개편은 병력 감축이나 전력 현대화 작업과 같이 논의해야 하는데, 이런 건 쏙 빼고 젠더 차원에서 논의하는 게 과연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때로는 젠더 문제 가시화가 다른 모순이나 문제를 은폐하는 데 활용될 수 있습니다. 징병제 논란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라고 봅니다.”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 때론 충돌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예를 들면, 과거 독재 시절은 곧 국가검열의 시대였고 민주화가 되면서 검열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논쟁과 비판이 채운 건데, 요즘 페미니즘 이슈에선 자기 검열이 좀 강하게 작동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지금까지 억눌렸던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죠. 저는 솔직히 강남역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놀랍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성산업 종사 여성이나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매일 밤 수십 명씩 죽어가고 있거든요. 페미사이드(여성살해)는 일상이에요. 여성이 남편한테 맞아 죽는 건 ‘과실치사’인데, 여성이 남편을 죽이면 ‘살인’이 돼요. 여성은 정당방위를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런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하면서 조금 지나친 면도 나타나는데, 이건 다 같이 돌아봐야 하는 시점인 거 같아요. 어느 나라 사회나 여성주의가, 여성 참정권운동만 빼구요, 30년 이상 여성운동이 지속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여성운동이) 30년이 넘었거든요. 1983~84 년에 여성의전화, 또하나의문화 같은 단체가 만들어졌으니 그때부터 치면 40년 가까이 지속돼 온 거죠.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길게 여성운동이 이어진 건, 처음에 (여성운동이) 민주화운동과 결합했기 때문이에요.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사회운동으로서, 부문운동으로서 그렇게 시작을 했던 거죠. 거기서 정말 페미니스트가 된 이들도 있고, 여전히 여성 민주화운동가로 남은 분들도 있고…. 그런데 요즘 여성들은 이런 역사를, 우리 현대사를 잘 몰라요. 관심이 없는 거 같아서 안타깝죠, 그런 역사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니까요.”

전에 쓴 책에서 ‘페미니즘이 반드시 정체성의 정치에 기반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셨는데, 요즘 보면 페미니즘 정체성의 정치는 더 강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일까요? 페미니즘이 정체성의 정치에 기반할 때 어떤 한계가 나타날 수 있습니까?

간단히 말할까요? 본디 정체성의 정치는 불가능합니다. 정체성의 정치는 동일시의 정치인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내외부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죠.”

선임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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