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영화들 이야기입니다.

 


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전·현직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취재 뒷이야기와 걸작 리스트 등을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이태훈 기자의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영화들 이야기입니다.

'칸다하르(Kandahar·2001)' 모흐셴 마흐말바프 감독
한동안 갑자기 온 나라가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아마도 이만큼 아프가니스탄이 뉴스에 많이 등장한 것은 2007년 두 명의 희생자를 냈던 탈레반의 한국인 납치 사건 이후 처음일 듯 합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우리는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중동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에 있는 나라라는 걸 아는 사람도 매우 드물 겁니다.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때부터 오랜 세월 ‘제국의 무덤’으로 불렸던 아프가니스탄 이해를 위한 길잡이로는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의 조언을 모아 쓴 최근 조선일보 기사 영국·러시아·소련·미국도 졌다… 이 땅은 ‘제국의 무덤’을 권해드립니다.

책이 부담스러운 분들을 위해서 ‘영화로 보는 아프가니스탄 입문’을 준비했습니다. 안 그래도 신경 쓸 것 많은 세상, 꼭 아프가니스탄까지 알아야 하는 걸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사막에 묻힌 보석처럼 빛나지만 외면 받아온 아프간에 관한 영화들을 소개해버릴 수 있는 좋은 핑계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각 영화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코끼리 몸의 한 부분을 만지듯, 한 측면만을 강조해 보여줄 뿐입니다. 먼저 이번에 소개할 영화들과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어림잡아 표시한 연표가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영화들 /그래픽 이태훈 기자
이 나라는 늘 전쟁 중입니다. 1978년 공산당이 유혈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이듬해 침공한 소련이 1989년 철군할 때까지,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아프간 사람 56만~200만명이 죽고 600만명이 난민이 됐습니다. 소련 영향 하에 있던 시기는 그 뒤 이어지는 역사에 결정적이었습니다. 빵보다 많은 총과 폭탄이 보급되고, 수백만개의 지뢰가 전 국토에 뿌려졌으며, 부족 장로와 이슬람 학자 중심이던 사회 체제는 급속히 군벌 중심으로 재편됐습니다. 이전부터 이어져 오던 파슈툰, 타지크, 하자라, 우즈베크 등 민족 그룹간 갈등의 골도 깊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법보다 총칼과 주먹이 훨씬 가까운 나라가 돼버린 겁니다.

"뮬라(Mullah)들은 우리 영혼을 지배하려 했고,
공산당은 우리에게 영혼조차 없다고 했지."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2007)’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1978년의 아프가니스탄과 2000년의 미국 캘리포니아를 오가며 진행됩니다. 1978년은 처음 공산정권이 들어서던 시점이고, 2000년은 기세등등했던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지배하며 이후 9·11테러를 저지르는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를 품어주던 시기입니다. 파슈툰족 소년 ‘아미르’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지만, 성공한 사업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늘 억눌려 있습니다. 하자라족인 집안 하인의 아들 ‘하산’은 늘 아미르의 편입니다. 아미르가 연싸움 대회 나갈 때 마다 실이 잘린 연을 찾아주는 충직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파슈툰족은 탈레반의 주력이자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적 종족이고, 몽골 정복자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하자라족은 동양적 외모로 천대받는 소수 부족입니다. 이 종족 갈등은 비극을 잉태합니다. 어느 날 아미르의 비겁함 때문에 하산과의 사이에 말 못 할 비밀이 생기고, 아미르는 하산이 도둑질을 했다는 거짓말로 하산과 아버지를 집에서 쫓겨나게 합니다. 공산정권을 피해 아버지와 미국으로 이주한 아미르가 2000년 아프가니스탄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속죄를 위한 아미르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고, 전설적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2007년의 최고 영화 5편 중 한 편으로 꼽은 영화도 수작입니다.

"이슬람은 다른 종교가 아니야.
다른 법을 가진 다른 세계다."

아미르 가족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고 1979년 소련이 친소 공산 정권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다른 제국들이 그러했듯,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 깊숙이 빠져들지요. 소련의 힘을 빼기 위해 미국과 동맹국들은 파키스탄을 통해 성전(聖戰·Jihad)의 전사 ‘무자헤딘’, 반(反)소련 반군을 지원했습니다. 이 얘기를 담은 톰 행크스와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찰리 윌슨의 전쟁’(2007)도 있지요. 결국 버티지 못한 소련은 1989년 쫓기듯 철수합니다.

러시아 영화 ‘제9중대(The 9th Company·2005)’는 소련군이 지난 8월의 미군처럼 대규모 철수를 감행하던 1989년 2월, 아프가니스탄 격오지의 고지를 사수하려던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입니다. 유령처럼 신출귀몰하는 무자헤딘 반군, 선전영화처럼 과하게 처절한 전투 장면은 좀 거슬리지만, 이 영화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러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각자의 꿈을 가진 철없던 젊은이들은 제국주의 국가들(미국 영국 등을 말하겠죠?)로부터 아프간의 형제들을 구한다는 대의에 충실하게 혹독한 군사훈련을 감내하고, 용맹하게 싸웁니다. 하지만 실제로 겪는 전쟁은 그저 생존을 위한 투쟁일 뿐, 모든 것이 덧없습니다. 이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베트남전 영화 ‘풀 메탈 자켓’을 영화적 구조와 서사 등 여러 면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개봉 당시 러시아의 오스카에 해당하는 ‘골든 이글 어워즈’에서 작품·촬영·음악·음향상 등 4개 부문상을 받았고, 기록적 흥행 성적을 올렸습니다.

소련 철수 후 수립된 나지불라 정권이 1992년 무너지고, 무자헤딘과 극렬한 내전을 통해 승리한 탈레반이 1996년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에미레이트(토후국)’를 세웁니다. 아프간 국토 대부분을 장악한 탈레반은 2001년 9·11테러 뒤 오사마 빈 라덴 신병 인도를 거부한 탈레반을 응징하기 위해 미·영 군이 침공해올 때까지 무자헤딘 군벌들과 다시 내전을 이어갑니다. 탈레반이 인류의 고귀한 문화 유산 바미얀 석불을 폭파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도 이 즈음입니다.

"장벽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은 그보다 더 높지.
언젠가는 세계가 너희의 고통을 듣고, 구하러 올 거야."

이란의 명장 모흐셴 마흐말바프 감독의 ‘칸다하르(Kandahar·2001)’는 탈레반 치하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줍니다. 여성 인권 문제를 취재하는 아프간 난민 출신의 프리랜서 여기자 ‘나파스’는 겨우 탈출했던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갑니다.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고향에 남았지만, 아버지마저 죽은 뒤 홀로 된 동생이 “일식의 날 자살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동생을 구하러 가는 나파스의 길은 고난으로 점철되고, 그 여정 위에서 탈레반의 폭압, 만인이 만인을 적대하는 아프간 사회의 부조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이들을 유인하기 위해 지뢰 위에 인형을 뿌려놓는다는 걸 교육받는 아이들, 형형색색의 부르카를 입고 무리지어 사막을 걷는 여인들, 지뢰에 다리를 잃은 남자들이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의족을 쫓아 목발을 짚으며 뛰어가는 장면은 지금 봐도 충격적입니다.

감독은 화려한 색채와 상징적 이미지를 다루는 솜씨로 명성 높고, 영화는 칸 국제영화제에서 에큐메니칼 심사위원상을 받았습니다.

"죽은 척 해. 그래야 널 놔줄거야."

영화 ‘학교 가는 길(Buddha Collapsed Out Of Shame·2007)’은 아프간 바미얀의 거대 석불이 탈레반의 포격으로 무너져내리는 충격적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국내 개봉 때는 ‘학교 가는 길’이라는 향토적 제목이 됐지만, 영화의 원제는 ‘불상은 수치스러워 무너져 내렸다’입니다. 바미얀 석불은 물리적 포탄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행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 스스로 무너져 버린 것이라는 뜻일까요.

이 천진하고 귀여운 소녀는 읽고 쓰는 걸 배우러 학교에 가고 싶지만, 엄마는 집에 없습니다. 아마도 돈을 벌러 갔겠지요. 집에 있는 거라곤 달걀과 엄마의 립스틱. 그걸 이용해 노트와 연필 따위를 마련하고 어떻게든 학교에 가려 합니다. 하지만 어른도 아이도 심지어 학교의 여선생님과 교실 안의 여자아이들까지도, 세상 사람 모두가 소녀의 꿈을 반대하는 것만 같습니다. “여자애는 학교에 갈 수 없다”고 막아섭니다. 소년들은 석불이 무너진 자리에서 소녀에게 나뭇가지를 총처럼 겨누고, 노트를 빼앗아 찢어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립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악행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 마흐말바프는 이 영화를 찍을 때 19세였습니다. 아버지인 세계적 영화감독 모흐셴 마흐말바프를 포함해 영화인 집안 출신이긴 해도, 이란에서 나고 자란 10대 여성이 탈레반 정권의 여성 억압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영화를 만든 것 자체가 상징적입니다. 마흐말바프는 15살 때 만든 다큐멘터리 ‘광기의 기쁨(Joy of Madness)’으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자기 작품을 상영한 최연소 감독이 됐고, 이 작품 ‘학교 가는 길’은 베를린국제영화제 아동·청소년 부문에서 수정곰 상을 받았습니다.

'학교 가는 길(Buddah Collapsed Out Of Shame·2007)'의 한나 마흐말바프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들어간 미·영 군대가 순식간에 평정한 것 같았지만… 그럴리가요. 전쟁은 계속됩니다. 미국 주도의 나토군도 결국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지 못했습니다. 두손 두발 다 들어버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이 그 결과입니다.

"여기서 살아 남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기는 거야."

영화 ‘론 서바이버(Lone Survivor·2013)’와 ‘아웃포스트(The Outpost·2019)’는 왜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조차 아프가니스탄에서 쫓기듯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는지 보여줍니다. ‘론 서바이버’는 2005년 미 네이비씰 부대의 아프간 작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탈레반 지휘관 사살 작전에 투입된 특수부대원들이 산 속에서 양치기 소년 일행과 마주칩니다. 교전수칙에 따라 모두 사살해야 할까요? 아니면 인간의 도리에 따라 살려줘야 할까요? 특수부대원들은 양치기 일행을 살려주지만, 이들은 바로 탈레반에게 밀고합니다. 은밀한 작전 수행은 물 건너가고,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그들을 해방시키러 왔다는 미국의 편이 아닌 겁니다.

‘아웃포스트’는 생각할수록 오히려 명상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전쟁 액션 영화입니다. 아프간 정부군이 제 역할을 못하고 탈레반이 밤의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는 아프가니스탄, 미군은 국토에 대한 지배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략 요충지라 할 만한 지점에, 사실상 적진 깊숙이 전초기지(outpost)들을 만듭니다. 이 영화의 군인들이 한밤중에 도둑처럼 조용히 배치된 키팅 기지도 그런 전초기지들 중 하나. 아침에 눈을 뜬 군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사방이 봉우리로 둘러싸인 기지는 방어가 애초에 불가능한, 탈레반 저격병의 습격에 속절없이 죽어나가야 하는 곳입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전쟁, 군인들에겐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가 됩니다. 어쩐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제국의 무덤’에 20년이나 발목 잡혀 있었던 미국의 처지에 대한 거대한 은유처럼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