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87년 체제'에 갇혀…기득권자 됐는데 '개혁 세력'이란 망상
‘검찰개혁’은 권력 비리 손대지 말라는 것…부실 수사로 확인
文, 조국 사태 등 책무 방기…대장동 게이트 특검을 지시해야
이재명 당선되면 ‘진보의 가치’ 파국 맞게 될 것이란 위기감 커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나라인가’…원한 정치 벗어나 정책조합을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 시절 ‘진보 논객’으로 이름을 알린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문재인 정권에 날선 비판을 쏟아내자 진보 진영에서는 비난이 쇄도했다. ‘모두까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계기는 ‘조국 사태’였다. “진보의 위선을 드러낸 조국 사태는 내 영혼에 큰 충격을 줬다”는 고백이 ‘변절(?) 이유’를 압축한다. 지난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공저)’를 시작으로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보수를 말하다’로 이어진 책 출간은 그가 천착한 고민의 궤적을 보여준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최근 펴낸 책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나라인가’는 위선과 망상으로 얼룩진 문재인 정권을 고발하며 과연 촛불 시민이 원했던 정부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진 전 교수는 27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한 카페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586 운동권 세력들은 아직까지도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87년 체제’에 갇혀 있다”며 “민주화 세력 대 독재 세력, 개혁 세력 대 적폐 세력, 민중 세력 대 기득권 세력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 자신들의 위선과 위법을 정당화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대통령이 앞장서 정치적·윤리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려줘야 하지만 조국 사태 때도,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국면에서도 문 대통령은 그런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조국 흑서’ 공저자인 권경애 변호사,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과 함께 ‘선후포럼(SF포럼)’을 결성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치사회 지형의 중심을 잡아주는 중도층이 적지 않았는데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국민의힘에 입당하면서 중도가 차지하는 몫이 줄어 각 진영으로 흩어지는 분위기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 우리라도 힘을 합쳐 아주 작은 구심점이라도 되자는 생각에서 모였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1987년 체제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된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대통령 직선제는 독재 정권에 맞설 때는 의미가 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유효기간이 끝났다. 정치판에 양당제만 남았고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대통령 중심으로 정치인들이 ‘헤쳐 모여’를 반복하고 있고 대통령 자신도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어디까지 해도 되고 어디까지 하면 안 되는지 모른다. 그러니 대통령이 퇴임 후 안위를 지상 목표로 삼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586세대에 대해 ‘의식의 진보성과 존재의 수구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정신과 신체가 따로 놀고 있다는 의미다. 정신적으로 매우 낙후돼 있어 아직까지도 ‘87년 체제’에 사로잡혀 있다. 자기들은 민주화 세력, 민중 세력이고 상대는 독재 세력, 기득권 세력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 있다. 허구적이고 위선적인 상상계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신체적으로는 기득권층에 속해 있고 실제로 권력과 갖가지 유착 관계를 맺고 있다. 인맥·학맥과 각종 위원회 참여를 통해 프로젝트를 따내면서 먹고 사는 것이 모두 권력과 긴밀히 연결돼 있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기득권자가 됐는데도 이를 부정하며 외려 자신들이 개혁 세력이며 기득권에 저항하고 있다는 허위의식, 즉 ‘메코네상스(meconnaissance·자기 자신에 대한 오인)’에 빠진 것이다. 조 전 장관의 민낯인 동시에 586 운동권 세력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현 정권이 밀어붙인 검찰 개혁의 결과가 대장동 특혜 의혹 부실 수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시민사회가 원한 진정한 검찰 개혁은 권력에서 독립한 중립적 검찰, 국민의 감시를 받는 민주적 검찰이었다. 반면 문재인 정권이 원했던 것은 자신들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는 충견이다. 그들의 검찰 개혁 방향은 자신들의 비리에는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검찰 개혁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고 지금 대장동 게이트에서 그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대장동 부실 수사를 통해 그들이 말하는 검찰 개혁이 국민들이 원하는 개혁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보인 반(反)자유주의적 모습이 매우 실망스럽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계보를 잇는 정당이 왜 이런가.
△지금의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의 자유민주주의 정당이 아니다. 친문(親文) 586 세력의 운동권 조직일 뿐이다. 운동권 시절에는 지향하는 가치라도 있었지만 지금 그들을 묶어주는 것은 지저분한 ‘이권’이다. 사실 586세대는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고교 때까지 박정희식 국가주의와 ‘한국적 민주주의’를 배웠고 대학 입학 후에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을 배웠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선출된 권력’으로만 이해한다. 1987년 군부 독재에 맞서 쟁취한 직선제 민주주의, 그들의 인식은 딱 거기에서 멈췄다. 운동권 시절의 낡은 인민민주주의의 습성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자유민주주의와 계속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법치를 파괴할 뿐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집권하고 있는데도 반헌법적·반민주적 행태가 아무 거리낌 없이 분출되는 이유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의 포퓰리즘 정책과 행태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이 적지 않은데.
△이 후보에 대해서는 ‘사이다 발언’을 한다는 평가가 많다. 보통 사람들은 섣불리 하지 못하는 말이나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다. 지난해 코로나19 초기에 과천의 신천지 본부와 가평의 이만희 총회장 본거지 등에 쳐들어간 것은 그의 저돌적인 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본소득 등 ‘기본 시리즈’ 공약과 무차별적인 재난지원금 지급 등 포퓰리즘 정책들을 보면 ‘과연 나라의 미래를 맡겨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정책이 아닌 프로파간다(선전 선동)만 넘쳐나기 때문이다. 모든 가용 가능한 자원을 표를 얻는 데만 쓴다. (그가 당선되면) 진보의 가치가 사라지는 파국을 맞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이익집단으로 전락했다는 지적과 함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우려가 나오는데.
△왕도는 없다. 풀뿌리부터 재건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사실 진보 세력도 재생산 구조가 완전히 끊겼다. 노동 운동은 기득권화됐고 학생 운동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민 운동은 타락했다. 아래로부터 인재를 키워야 한다. 구의회·시의회에서 출발해 차근차근 성과를 내면서 정치적 역량을 쌓아 국회의원으로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지금처럼 명망가를 쫓아가서 줄을 서는 정치로는 희망이 없다.
-보수 야당이 대안 정당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체제에서 ‘신(新)정강정책’을 내놓았지만 국민의힘 사람들은 이를 무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입법으로 뒷받침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2030세대를 잡으라고 조언했는데 고작 내놓은 방식이라는 게 안티페미니즘과 능력주의였다. 과거보다 훨씬 더 퇴행적이다. 보수가 외연을 확대하려면 중도층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존 보수층의 주장을 상당 부분 연성화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국민의힘을 보면 희망을 갖기 쉽지 않다.
-11월 5일 국민의힘 대선 후보 확정에 앞서 조언한다면.
△후보 자신을 점검하고 캠프를 재정비해야 한다. 현재 윤석열·홍준표 후보 모두 여당의 이재명 후보에 밀리고 있다고 본다. 야당이 반등 기회를 얻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혁신적으로 가야 한다. 과감한 정치 혁신과 시대 정신에 맞는 어젠다 세팅이 필요하다. 선거 제도 개편이나 대통령 권한 축소 등 혁신 메시지가 뒤따라야 한다. 대장동 특혜 의혹 국면인 만큼 부동산 대책 등 경제 문제에서 민주당보다 진전된 의제를 선점해야 할 것이다. 특히 철저한 자기 점검이 전제돼야 한다. ‘폴리티컬 커렉트니스(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재점검이 필요하다. 최근 젠더 감수성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만큼 소수자 차별 발언을 하지 않도록 전면적인 인식 점검이 이뤄져야 한다.
-임기 말을 맞은 문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해 평가한다면.
△국론이 분열되고 민심과 당심이 이반됐을 때, 단적인 예로 조국 사태 당시 문 대통령이 윤리적 판단을 하지 못했다. 외려 ‘조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는 취지로 말해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이번 대장동 의혹 국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로 의혹이 쏟아지는 상황이면 대통령이 나서서 특검을 하라고 지시하는 게 상식이다. 정치적·윤리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는 게 대통령이 당연히 해야 할 책무인데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산 격차 심화, 무너진 계층 사다리, 최악의 출산율 등 부정적 지표가 쏟아지고 있다. 복합 위기 속에 맞이하는 내년 3월 대선은 장기적 추세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해법을 보고 표를 행사하는 ‘정책 대결의 장’이 돼야 한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만큼 정치권이 힘을 합쳐야 해결할 수 있다. 원한의 정치에서 벗어나 다른 쪽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된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 진보·보수 정책의 실용적 조합, 그에 대한 정치적 합의와 사회적 대타협, 양 진영을 설득하기 위한 통합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He is…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자유대에서 언어 철학을 공부했다. 2009년 중앙대 겸임교수를 거쳐 지난해까지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를 지냈다. 스스로를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논객이자 미학자’라고 규정한다. 주요 저서로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미학 오디세이’ 등이 있다.